박기정의 장비병에 관한 짧은 글.

나는 소비를 그리 즐기는 사람이 아니다.
비싼 밥을 사먹는 것도, 새 옷을 사는 것도
당위성을 느끼지 못하면 굳이 하지 않는다.

나의 생활이 궁핍하다고 느끼지도 않고
자산의 공격적인 축적과 증식에 혈안이 되어있지도 않지만,
쓸 필요가 없는데 굳이 써야하나? 라는 생각을 상당히 많이 하는 것 같다.

필요없는 소비를 없애는 것이
나에게나 이 세상에게나 도움이 되는 방식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고,
"나의 자산을 아낀다!" 에서 오는 묘한 만족감도 있는 것 같다.

그런고로 나는 매일 도시락을 싸 다니고,
누군가 길에 내다버린 신발을 신고 다니기도 했다. (진짜 멀쩡했다!)

하지만 이 세상에 나와 같은 사람들만 가득했다면
경기는 침체되고,
자영업자 분들은 설 자리를 잃고,
인류는 쉼없이 쌓아올린 상아탑을 제 손으로 무너뜨린 후
다시 자급자족과 품앗이, 두레와 함께하는 토속적 도시생활을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얘기를 늘여놓으려던 건 아니고.

올해 들어
나의 잔고를 달달하게 빨아가고 있는
한가지 확고한 소비 영역이 생겨버렸다.
그것은 바로...
촬영장비를 구입하는 것이다.

나의 번째 카메라

나의 장비병은 이 카메라를 구입하면서 시작되었다.
Sony 사의 a7m3.

내가 누구? "SONY ILCE-7SM3 오너".

이 영롱한 자태를 보라!

작업을 위한 투자에 고민하면서 시간을 버리지 말라는 친구의 말에
큰맘먹고 질러버린 카메라였다.

100만원이 넘는 가격의 중고거래를 해 본 적이 없어서
경계하는 마음 반, 그 마음을 안 들키려는 마음 반으로
거래한 기억이 난다.

하지만 막상 사서 이것저것 촬영해보니,
"작업은 장비빨"이라던 친구의 말이 맞았던 것 같기도 했다.

다만 중고거래다 보니 배터리 충전기가 없어서
(네고 시 좋은 카드가 되어주었지만)
배터리 충전기를 따로 사긴 해야했지만 괜찮았다.
충전기 따로 사는 김에 여분 배터리도 하나 있으면 좋으니까 사고,
좀 더 조사를 해보니 외부 배터리를 연결할 수 있는 장비도 알게 되었고,
그리고 조금 더 공부를 해보니...

거기서 멈췄어야 했다.

셋업에 대한 욕망은 멈출 줄 모르고

촬영을 수월하게 하기 위해서는
촬영 보조장비에도 어느정도 투자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메라에 달 보조장비로 처음 샀던 건 Smallrig 사의 케이지였다.
다른 보조장비를 달기 위해 장착하는, 구멍이 뚫려있는 하드 케이스라고 보면 될 것이다.
("다른 보조장비를 달기 위해" 라니... 이것을 산 것이 화근이었는지도 모른다.)

I SHOP, THEREFORE I AM.

힘세고 강한 카메라! 진짜 이 때 멈췄어야 했다.

보조장비를 달고 나니
정말 내 카메라가 맞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편의와 취향대로 커스터마이징할 수 있는,
오롯한 나의 장비라니!

장비에 투자를 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선순환적인 일로 느껴졌다.
투자한 만큼 더 큰 성취로 보상받고, 또 다시 투자하는 순환이 이뤄진다면
그것보다 더 건강한 동기부여 방법이 있을까?

다만,
세상에 어떤 것이 안 그러겠냐마는, 과하게 탐내면 화를 입을 수 밖에 없다는 걸 상기시켜야 했다.
어느새 장비의 필요성에 대한 고민 없이
와멋있다 -> 간편결제로 이어지는 사고회로가 생성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셋업, 결코 셋업!

케이지를 산 이후로 한동안 나의 관심은 오로지 장비를 사는 것에 몰두했다.

'이 케이지에 아주 보조장비들을 주렁주렁 달아버리겠다.'

이런 야욕을 마음 깊숙한 곳에 품고서는
틈만 나면 중고나라, 번개장터, 아마존알리 익스프레스를 드나들며
마치 주식이나 코인 창을 확인하는 뉴스 속 젊은이들처럼
(사실 나는 그렇게까지 자주 확인할 필요조차 없었음에도)
장비들을 검색하고 비교하고 견적을 냈다.

그러다가 한 번이라도
꽤 괜찮은 조건의 상품을 찾게 되거나,
"근데 진짜 필요하긴 할 듯ㅋㅋ"이라는 자기합리화에 성공하거나,
아니면 그냥 나의 사고회로를 중간에 막지 못했던 경우에는
어느새 나의 것이 되어있는 장비들을 넋놓고 구경하는 수밖에 없던 것이었다.

그만두기엔 너무나도 늦어버렸다.

나는 이제 그냥 카메라를 들기 위해 팔운동 하는 사람이 되어버렸고

밝은 환경에서 노출을 잡아주는 ND필터,
무선으로 초점을 잡게 해주는 팔로우 포커스,
HDMI 연결을 도와주는 명칭도 모르겠는 액세서리까지.
순식간에 구매해버린 후 왜인지 모르게 느껴진 복잡미묘한 감정을 잊지 못한다.
기분이 좋기는 한데, 진짜로 필요한 순간이 오겠지? 싶은 느낌.

게다가 한 가지 장비를 사면
그 장비에 맞는 배터리를 사야 하고,
그 장비를 고정시킬 액세서리를 사야 하고,
그러다보면 더 편한 방법을 가능케 해주는 다른 장비가 나타나면서
나를 헤어나올 수 없는 소비의 굴레에 빠뜨리고 있었다.
나의 셋업은 "이걸 들고 촬영을 한다"는 현실적 조건에서 점차 벗어나고 있었고,
이대로 가다간 더 좋은 카메라를 살 정도의 값을 장비 구입에 소비한 셈 되어버릴 것 같았다.

다행히도 그 때가 되어서야
뭔가 잘못되고 있다고 느낄 수 있었다.
장비 구입을 당분간 멈추기로 했고,
지금 내가 가진 장비들에 완전히 숙련된 이후에 새로운 장비를 찾아보기로 마음먹었다.

결국 어떻게 되었는가

결국 나는 내가 구입한 장비들을 십분 활용해
가장 효율적인 촬영 셋업을 구성할 수 있었고, 그 상태로 준수하게 촬영에 성공했다.

그렇다면 장비병으로부터도 벗어났는가?
안타깝게도 그렇지는 않다.
장비병을 내 과거의 치기어린 기억으로 넘기는 듯한 마무리로 글을 끝맺고 싶었지만
사실 장비병에서 벗어나지는 못한 것 같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근로 월급 들어오기만 하면
바로 카메라에 외장 모니터 하나 달아 줄 생각에
아주 그냥 드릉드릉하기 때문이다.

장비병과 재정난의 자강두천

먼 미래, 박기정의 장비병이 완치되었을 때 그의 촬영 셋업 상상도.

하지만 충동적이고 무리한 소비를 하지는 않을 것이다.
장인은 도구 탓을 하지 않는다고들 하지만,
그건 자신의 부족함에 있어서 도구 뒤에 숨지 않는다는 뜻이다.
자신의 성취에 필요한 도구를 아무런 열망 없이 대한다면 과연 그 사람을 장인이라 할 수 있을까?

투자와 성취, 둘 사이의 밸런스를 잡으며
건강하고 장기적인 선순환이 일어날 수 있도록 항상 노력해야겠다.

다시 뷰파인더로.